국어 수업

듣기 수업

릴 라 2012. 9. 22. 17:46

“귀 기울여 들으면 마음도 헤아리게 되죠”
말길 마음길 열어주는 공부, 안동 국어 선생님들과 제자들


두 귀만 있으면 당연히 듣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교사들은 학생들의 ‘듣기’를 우려했다. 요즘의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만 할 줄 알지 상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관심이 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듣는다’는 것에 대해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닐까? 듣는 능력 또한 읽기, 쓰기처럼 교육을 통해서 기를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안동 예천 지역의 국어 교사들, 김두년(60), 김명희(56), 강상호(49), 이림(46), 추선화(31)씨는 그렇게 2004년부터 ‘듣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학생을 탓하기 전에 교사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마음으로 듣기까지, 그 속에서 변화된 교사와 학생들의 이야기.


읽기, 쓰기처럼 ‘듣기’능력도 키울 수 있어요

“준비물 다 갖고 왔니? 컵도 갖고 왔지?”
“아뇨. 컵은 얘기 안 하셨잖아요??”
“뭐라구?”
일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종종 이런 경우에 놓여봤을 것이다.
“준비물을 얘기해주면 귀담아 듣는 게 아니라, 그거 그거려니 먼저 판단해 버리니까 못 듣는 거죠.” (이림 / 46세. 예천여중 교사)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 있게 못 듣는 경우가 많고, 관심 있는 분야만 듣다 보니 전혀 엉뚱하게 듣기도 해요. TV 같은 보이는 것에 익숙한 영상세대다 보니 듣기에 약해진 것 같아요.”
(추선화 / 31세. 안동고 교사)

언젠가부터였다. 선생님이 느낀 아이들은 자기 것을 쏟아낼 줄은 알지만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대에 대해 알고 싶다거나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할까?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1995년부터 국어 교육을 고민하며 모임을 가져온 경북 예천 지역의 선생님들, 그들은 2004년 ‘말하기’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보자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한참 논의를 하던 중 아이들의 ‘듣기’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듣는 이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면서 하는 말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듣는다’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해온 것이 아닐까? 읽기와 쓰기처럼 듣기 능력도 길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예천 국어 교사들의 ‘듣기’ 연구는 시작되었다.

선생님들은 먼저 듣기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낮은 수준부터 높은 수준까지 단계별로 문항을 개발했다. 잘 듣지 못해서 생기는 아버지와 아들간의 갈등, 교사와 학생간의 문제 등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상황들을 그대로 담으려 했다.

‘듣기CD’는 아나운서가 아니라, 다섯 명의 교사가 사투리를 살려가며 직접 만들었다. 생활 속에서의 듣기 능력을 키워주자는 배려였다. 그리고 국어 시간을 이용해 ‘듣기’ 교육을 해나갔다. 단순히 문제를 푸는 것보다 학생들 스스로가 잘 듣고, 잘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잘 말하는 훈련이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되돌려 말하기’ ‘요약해서 다시 들려주기’ 나아가 이야기에 대한 내 느낌을 표현해보기까지….

“친구들이 발표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 얘기를 요약하고, 자기 감상도 쓰면서 평가를 하게 했어요. 들으면서 요약하고 자기의 느낌을 메모하고. 이런 훈련이 되면 어떤 글을 읽거나,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요점이 뭐구나 빨리빨리 알아들을 수 있을 것 아니에요. 핵심을 모르면 왜곡을 하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잘 들어야 되는 거고, 마음으로 들어야 되는 거죠. 그게 듣기 능력이고요.”
(김명희 / 56세. 안동중 교사)

상대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있어야 잘 듣게 돼요

처음에는 전혀 엉뚱하게 듣고서 자기 관심 분야만 이야기한다거나, 친하지 않은 아이가 이야기할 때는 소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서서히 변화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말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을 조금만 열면 들린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는 듯했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잘 들어주면 기분이 좋잖아요. 내 얘기를 다른 애들이 들어줄 때의 기분을 아니까 다른 친구한테도 그렇게 하게 되는 거죠.”

추선화 교사는 2년 동안 담임을 맡았던 한 학생의 변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소극적이고, 늘 소외돼 보이던 아이였어요. 그런데 듣기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이 호응하면서 잘 들어줬어요. 떠는 것 같으면 배려해주고. 그러니까 신나잖아요. 나중에는 당당하게 큰소리로 말을 잘하더라고요. 또 잘 들으려고 하고요. 끝날 때쯤 다른 애들은 그 친구 덕분에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하고, 또 본인도 고맙다 하고, 아주 좋았죠.”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교사들은 애초부터 소극적이다, 잘 듣지 못한다, 말을 못한다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다.

주변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길러질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듣기’를 가르치는 사이 교사들은 바로 자신의 듣기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한다. “학생을 탓하기 이전에 교사 스스로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사인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만 중요하고 제 기분만 중요하다고 여겼더라구요.

아이들에게 내 말만 잘 들어라 할 뿐이었고, 어린 아이들이 뭘 알겠어, 하며 학생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마음을 읽어내는 것에는 소홀했었다는 게 많이 반성이 됐어요.”
자신부터 바꿔 보기로 선생님들. 선생님이 바뀌자 반 분위기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한다. 김명희 교사가 자신의 경험담 하나를 이야기했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면 애들이 산만해지잖아요. 예전엔 소리를 질렀어요. 그럼 애들도 반사적으로 ‘종 쳤잖아요’ 하면서 제가 밉다는 반응을 보여요. 매번 그렇게 기분이 상해서 교실을 나오곤 했는데, ‘종은 쳤지만 하던 걸 마무리하고 싶은데 너희들이 자리를 이탈하니 꼭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 하고 솔직히 말했더니, 아이들도 ‘다음 시간이 체육 시간이라서 옷 갈아입어야 돼요’ ‘음악 시간에 실기 평가라 연습해야 돼요’ 등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남을 이해하는 게 깊어져요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이 바뀌자 아이들도 따라서 마음을 열고 바뀌더라는 것이었다. 마침 중학교 3학년 때 김명희 선생님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는 학생 네 명이 선생님을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이들에게 그때의 국어시간은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추억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한다.

“한번은 전부 다 돌아가면서 자기의 콤플렉스를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한 친구가 자기는 이가 별로 안 예뻐서 웃을 때 입을 가린다고 하면서 부끄러워해서 우리가 다 아니라면서 괜찮다, 예쁘다 얘기해줬어요. 예전엔 친한 친구들끼리만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다 친하게 지냈어요. 남을 이해하는 게 더 깊어진 것 같아요.”(권상아 / 안동여고 2학년 ) 옛 수업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던 아이들은 그때를 떠올리며 “무엇보다 자신들의 말을 존중해주고 잘 들어주는 선생님이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예천국어교사 모임 선생님들은 2004년부터 3년간 2주에 한 번 꼴로 모임을 가지며 밤늦게까지 듣기 교육 자료를 만들곤 했었다. 현재는 다른 지역으로 학교를 이동하는 바람에 모임 자체는 중단됐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듣기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는 선생님들. 그들은 ‘듣기’야말로 꼭 필요한 국어교육, 인간교육이라 강조한다.

“애정이 없이는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없어요. 그래서 마음을 읽는다는 말도 있구요. 결국 듣기는 관심이고 사랑이에요. 우리 사이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게 바로 그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