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살해하는 나라/ 김현수
- 기업 살인법 제정과 제대로 된 청년 일자리 정책을 촉구하며
얼마 전 찾아온 한 청년의 호소는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줄곧 온갖 시험과 자격증, 아르바이트와 학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30대 초반이 된 지금, 여전히 공공 분야의 비정규직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도 1년을 일하고 나면 근무를 더 계속할 수는 없는 터라 곧 다른 직장을 알아보아야 한다. 청년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눈 뒤에 그만하고 싶다는 의미가 꼭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니라고 확인하고서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자신을 비롯하여 부모, 사회를 깊이 원망한다는 이야기를 토해내었다.
30대 초반의 한 청년과 길게 나눈 이야기 속에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여러 모순과 갈등, 번민과 고통을 함께 느꼈다. 구의역 김 군의 컵라면부터 태안 화력 발전의 고 김용균 님으로 이어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청 비정규직 청년들의 죽음. 그리고 최근 40일이나 지나서 발견된 부산 30대 여성의 방치된 죽음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과 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한 청년의 고백에는 무거운 울분이 침전되어 있었다.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삶 속에서, 온갖 영상이나 광고에서 전시된 풍요는 마치 영화장 세팅처럼 헛된 속임수와 다를 바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청년들은 정규직 전쟁 혹은 안정된 삶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져 마음과 몸이 온통 타박상으로 얼룩져 있다. 대학까지 마치고 자립을 향한 마지막 순간에 만난 사회진출의 문은 마치 굳게 닫힌 성문처럼 서있다. 공상과학영화나 좀비 영화에서 보듯이 저 벽을, 저 문을 넘기 위해서는 셀 수 없는 시도와 죽음 끝에 소수만 올라갈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밤거리의 술 냄새 만큼이나 피비린내 나는 사회이다.
각박한 인생의 쓴맛을 보고 지내는 청년들이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 비정규직이 된다. 직장에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위험을 감수하며 일해야 한다. 특히 기본적인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공간에서 또 ‘누군가’의 지시로, 그 일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 채 ‘투여’된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재’로 사망하게 된다.
더구나 그런 무고하고 억울한 죽음 후에도 애달픈 마음은커녕 한 생명과 그 죽음에 대한 숭고함까지 자본이나 법률로 매몰시켜버리는 일을 우리는 거의 매일 겪고 있다. 그러고도 그 누군가들은 ‘호의호식’하며 지내고, 죽음을 불러낸 위험의 구조는 견고하며 줄지어선 또 다른 청년들이 다음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투여되고 있다.
이 사회의 기업주들은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명백히 답을 하고 있다. 그들의 돈이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인간보다 공정(工程)이 중요하고, 진실보다 기업의 주가가 더 중요하다는 답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이 말했듯이 건물을 쌓아올리기 위해 비계를 오르내리다 떨어지는 청년을 낙엽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신과 의사로서 청년들의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통역하여 그 메시지를 전달하면 다음과 같다. “위험 업무에 안전을 챙기지 않고 사람을 뛰어들게 하는 것은 그 작업공정에서 기계에 의해, 전동차에 의해, 물에 의해 살해되어도 무관하다는 살인 청부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지시가 결국 생명을 앗아가는 원천이다. 위험 업무에 비숙련자를 싼값에 투입하도록 결정하고 목숨을 잃게 한 기업은 당연히 살인 청부 기업이다. 한 고귀한 청년이 위험한 일을 할 때 가능한 모든 안전을 챙겨주어도 모자란다는 인식이 없는 것은 악마와 손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우리는 주체의 시각에서 이 용어를 재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업가, 고용주를 위한 언어이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은 노동자의 시각에서, 우리 집 아들의 시각에서, 그 아버지의 시각에서 보면, 위험상황에 대한 과도한 업무 투입으로 인해 작업과정에서 노동자가 살해되는 것이다. 그 재해가 ‘인재’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런 공정을 방치하거나 위험을 제거하지 않고 사람을 투입한 기업과 기업가에게는 당연히 살인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 청년과 그 가족들 마음의 울분 중 한 켠이라도 공감한다면 대책을 뒤로 미룰 수 없다. 모든 청년과 노동자를 위한 그 대책이 영국에서 시행 중인 바로 기업살인법이다. 작업과정에서 살해당한 노동자가 OECD 가입 국가 중 가장 많다는 사실은 자살률 1위 이야기만큼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청년 살해’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현상이 되는 이유는 중산층 진입조차 허용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대기업과 관료 엘리트들의 횡포로 안전을 위한 1%가 아직도 투자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로버트 프랭크 교수가 말한 1%의 승자독식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엘리트 독식 사회의 저자 아난드 기리다리다스가 말한 것처럼 그 횡포를 막아낼 엘리트가 아직 위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내 아들도, 또 내 친구의 딸도, 우리 직장 동료들의 자식 그 누구도 위험한 일에 투입되어 한 번뿐인 인생을 작별하게 하고 싶지 않다. 위험을 만드는 기업가들과 그 위험을 관리하는 관료들에게도 이 특별하지 않은 소망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 내부 조직에서 그 의식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장치가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또 그들의 내면도 독식의 악마로부터 깨어나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가 최선을 다해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는 영역이 더 커가기를 갈망한다.